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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otr Tchaikovsky

표트르 차이콥스키 (1840–1893)

"영감은 게으른 자를 찾지 않는 손님이다 - 영감을 부르는 이에게만 찾아온다."

한눈에 보기 🔭💭

1. 뿌리러시아 봇킨스크 출생유리 같은 아이어머니의 죽음2. 수련법률학교 졸업페테르부르크 음악원안톤 루빈스테인3. 격변파경의 결혼폰 메크의 후원교향곡 4번4. 전성기백조의 호수오네긴바이올린 협주곡5. 발레시대클린 정착잠자는 숲속의 미녀호두까기 인형6. 말년비창 교향곡조카 밥 헌정상트페테르부르크 죽음차이콥스키1840–1893운명의 선율과 파경의 결혼, 비창으로 삶을 닫…
삶의 여정 🧭🗺️
N러시아봇킨스크1840–1848상트페테르부르크1850–1866모스크바1866–1877클린1885–1893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곁의 사람들 ⏳🌊

  • 가족알렉산드라 차이콥스카야

    그가 열네 살에 콜레라로 잃은 어머니로, 평생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 스승안톤 루빈스테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세우고 그를 엄격하게 가르친 스승.

  • 스승니콜라이 루빈스테인

    모스크바 음악원에 그를 영입하고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혹평했다가 뒤늦게 인정한 스승.

  • 영향밀리 발라키레프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제를 제안하고 구성까지 조언해 준 '5인조'의 작곡가.

  • 후원나데즈다 폰 메크

    13년간 편지만으로 교류하며 그를 재정적으로 후원한 미망인 후원자.

  • 가족블라디미르 '밥' 다비도프

    여동생 사샤의 아들로, 말년에 가장 의지한 조카이자 교향곡 6번의 헌정 대상.

YouTube에서 8곡 이어 듣기 ↗

I. 봇킨스크의 소년 · 1840–1850 (0–10세)

(봇킨스크) 1840년 5월, 러시아 우랄 산맥 서쪽의 작은 공업 도시 봇킨스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일리야 차이콥스키는 금속 공장을 감독하는 기사였고, 어머니 알렉산드라는 프랑스계 혈통을 지닌 집안 출신이었다. 가족은 모두 여섯 남매였는데, 열 살 아래의 쌍둥이 동생 아나톨리와 모데스트, 여동생 알렉산드라(사샤)는 훗날 그의 삶에서 각별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모데스트는 뒷날 그의 첫 전기를 쓴 사람이기도 하다. (유리 아이) 다섯 살 무렵부터 피아노를 배웠는데, 집에 고용된 프랑스인 가정교사 파니 뒤르바크는 그를 유난히 예민한 아이로 기억했다. 음악을 들으면 눈물을 흘리거나 흥분해 잠을 이루지 못했고, 뒤르바크는 그를 두고 "유리로 만든 아이" 같다고 말했다 - 조금만 건드려도 금이 가는 아이라는 뜻이었다. 이 섬세함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이주) 1848년 아버지의 전근으로 가족은 모스크바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 갔다. 열 살이던 그는 기숙 생활을 하는 제국법률학교에 들어가야 했는데, 어머니가 기숙사에 그를 남겨 두고 떠나던 날 마차를 붙잡고 따라 뛰며 울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어머니와의 이 이른 이별은 그가 평생 느낀 불안정함의 뿌리로 자주 언급된다.

II. 법률학교에서 음악원으로 · 1850–1863 (10–23세)

(상실) 1854년, 열네 살이던 그는 콜레라로 어머니를 잃었다. 이 죽음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다고 훗날 스스로 여러 차례 편지에 썼다. 이후 그의 음악에 되풀이해 나타나는 운명과 죽음이라는 주제의 뿌리를 이 상실에서 찾는 해석이 많다. (법무부) 1859년 법률학교를 졸업한 뒤 법무부의 하급 관리로 일했다. 안정적이지만 따분한 자리였고, 음악에 대한 갈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 음악가는 존중받는 직업이 아니었으므로, 관직을 버리고 음악을 택하는 일은 집안의 체면을 흔드는 결정으로 여겨졌다. (음악원) 1861년 러시아음악협회의 야간 강습에 다니기 시작했고, 이듬해 안톤 루빈스테인이 새로 세운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정식으로 입학했다. 1863년 관직을 그만두고 음악에 전념하기로 하자 집안에서는 불안해했지만 아버지는 그의 선택을 지지했다. 루빈스테인은 엄격한 스승이었고, 1865년 졸업 연주로 내놓은 칸타타를 고치지 않으면 연주회에 올리지 않겠다며 못마땅해했고, 이듬해 비평가 체자르 큐이는 신문에서 이 곡을 혹평했다. 이런 평가는 뼈아팠지만, 동시에 그가 평생 품게 될 엄격한 작곡 기준의 출발점이 되었다.

III. 모스크바와 초기 교향곡 · 1866–1876 (26–36세)

(모스크바) 1866년, 안톤 루빈스테인의 동생 니콜라이 루빈스테인의 초청으로 새로 문을 연 모스크바 음악원의 화성학 교수로 부임했다. 급여는 넉넉지 않았고 한동안 니콜라이의 집에 얹혀살았다. 가르치는 일은 성실하게 해냈지만, 그의 진짜 관심은 늘 작곡에 있었다. (교향곡 1번) 같은 해 완성한 교향곡 1번 "겨울날의 환상"을 쓰는 동안 과로와 불안으로 몸이 상해 환각과 불면에 시달렸다. 평생 보인 신경질적인 예민함이 처음으로 음악과 건강 모두에 흔적을 남긴 사례였다. (발라키레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5인조'의 밀리 발라키레프는 그와는 다른 노선, 즉 서양식 음악원 교육을 거치지 않은 민족주의 작곡가였지만, 1869년 그에게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주제로 곡을 써 보라고 권하고 구체적인 구성까지 편지로 조언해 주었다. 음악관이 달랐어도 이 조언은 그의 대표작 하나를 낳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샤) 우크라이나 카멘카에 있는 여동생 사샤의 집을 자주 찾았다. 사샤의 가정은 그에게 피난처였고, 그곳에서 만난 어린 조카들 가운데 블라디미르(애칭 '밥')는 훗날 그의 말년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된다. (반전) 1874년 완성한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니콜라이 루빈스테인에게 들려주었을 때, 그는 연주가 불가능하고 가치 없는 작품이라고 면전에서 혹평했다. 단 한 음도 고치지 않은 채 독일 지휘자 한스 폰 뷜로에게 헌정했고, 1875년 보스턴 초연이 성공을 거두자 루빈스테인은 뒤늦게 이 곡을 인정하고 직접 연주하기 시작했다.

♪로미오와 줄리엣 환상서곡1869 (29세)실황 Netherlands Radio Philharmonic · Slobodeniouk 지휘

발라키레프의 권유로 쓰기 시작한 곡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음악으로 맺은 대표적인 결실이다.

  • 도입부의 고요한 코랄풍 선율은 전통적으로 로렌스 신부를 그린다고 설명된다 - 목관이 낮게 깔리며 다가올 비극을 예고한다.
  • 현악과 잉글리시호른이 번갈아 노래하는 사랑의 주제는 서양 음악사에서 가장 유명한 멜로디 가운데 하나로, 훗날 수많은 영화 음악에 흔적을 남겼다.
  • 몬태규와 캐퓰릿 가문의 다툼을 그린 대목에서는 현악기가 빠르게 끊어 치고 심벌즈가 부딪히며 칼싸움 같은 긴장을 만든다.
  • 마지막 장송 행진풍의 타악기 울림 뒤 사랑의 주제가 다시 한 번 조용히 되살아났다가 스러지는 대목이 두 연인의 죽음을 암시한다고 널리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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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협주곡 1번 (Op. 23)1875 (35세)실황 Alexis Weissenberg (피아노) · Karajan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루빈스테인에게 혹평받고도 한 음도 고치지 않은 곡으로, 꺾이지 않는 그의 고집이 그대로 담겨 있다.

  • 첫머리의 웅장한 호른 주제와 피아노의 거대한 화음을 한 음씩 펼쳐 흐르게 하는 분산화음(아르페지오)은 유명하지만, 이 주제는 곡 전체에서 다시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 연주자들 사이에서 자주 회자되는 트리비아다.
  • 1악장 후반의 옥타브 질주 구간은 손가락이 가장 바삐 움직이는 대목으로, 당대 '연주 불가능'이라는 평을 들었던 이유를 체감할 수 있다.
  • 2악장 중간의 빠른 프랑스풍 춤곡 삽입부는 느린 서정 사이에 놓인 짧은 숨 돌리기처럼 들린다.
  • 3악장 피날레는 우크라이나 민요풍 춤곡 주제가 되풀이해 돌아오는 론도 형식으로, 거절당한 곡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당당하게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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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의 호수 (Op. 20)1876 (36세)무대 Rudolf Nureyev 안무 《백조의 호수》 — 「작은 백조들의 춤」

초연 당시 실패로 여겨졌으나, 그의 사후 재안무를 거쳐 발레 음악의 표준이 된 작품이다.

  • 오보에가 낮은 단조로 연주하는 백조 주제는 오데트 공주를 상징하며, 극 전체에서 반복되어 돌아온다.
  • '작은 백조들의 춤'은 현을 손가락으로 퉁겨 짧고 통통 튀게 소리 내는 피치카토 주법과 또렷한 발레 스텝이 맞물려, 가장 널리 알려진 안무 장면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 흑조 오딜의 파드되는 발레리나가 한 자리에서 서른두 번 회전하는 '푸에테'로 유명해, 기술적 완성도를 가늠하는 대목으로 자주 비교된다.
  • 1막의 왈츠는 밝고 활기찬 선율로, 뒤에 이어질 비극적 전개와 대비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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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결혼의 파국과 폰 메크 부인 · 1877–1878 (37–38세)

(청혼) 1877년, 안토니나 밀류코바라는 여성이 보낸 열렬한 연애편지를 받았다. 당시 그는 자신의 성향을 둘러싼 소문을 의식하고 있었고 평범한 가정을 꾸리면 안정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어, 서로 잘 알지도 못한 채 그해 7월 그녀와 결혼했다. (파경) 결혼은 몇 주 만에 무너졌다. 두 사람은 성격도 기질도 맞지 않았고, 그는 심한 정신적 위기를 겪으며 모스크바강의 차가운 물에 몸을 담가 폐렴에 걸려서라도 삶을 끝내려 했다고 음악원 동료 니콜라이 카시킨은 훗날 회고했다 - 다만 이를 전하는 기록은 카시킨의 회고뿐이어서 사실 여부는 논란이 있다. 안토니나와 다시 함께 살지 않았지만 공식적인 이혼은 하지 않았다. 동생 아나톨리와 함께 스위스 클라랑으로 요양을 떠났다. (폰 메크) 같은 해, 부유한 미망인이자 예술 후원자인 나데즈다 폰 메크가 그에게 편지를 보내 왔다. 그녀는 연간 6천 루블의 후원금을 제안하며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 평생 서로 직접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후 13년 동안 두 사람은 1,20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음악과 삶에 관한 깊은 속내를 나누었다. 이 기이하고 친밀한 관계 덕분에 그는 교수직을 벗어나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운명) 결혼 파탄을 겪은 그해, 교향곡 4번과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을 나란히 완성했다. 교향곡 4번은 폰 메크에게 "내 가장 좋은 벗에게"라는 헌사와 함께 바쳐졌고, 서두의 금관 선율을 그는 편지에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 직접 설명했다. 오네긴 역시 묘한 우연을 품고 있었다 - 여주인공 타티야나가 써 보낸 연서를 거절당하는 장면을 자신의 결혼 전에 이미 작곡해 두었는데, 정작 자신은 그 뒤 현실에서 구애받은 여인을 받아들여 파국을 자초한 셈이 되었다.

♪교향곡 4번 (Op. 36)1878 (38세)실황 hr-Sinfonieorchester · Carlos Miguel Prieto 지휘

결혼 파탄 직후 완성해 폰 메크에게 헌정한 곡으로, 작곡가 스스로 '운명'을 묘사했다고 밝혔다.

  • 서두에서 금관이 강렬하게 내지르는 '운명의 모티프'는 편지에서 작곡가 자신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직접 설명한 대목이다.
  • 2악장의 오보에 독주는 쓸쓸한 선율을 길게 끌며 체념 같은 정서를 그린다.
  • 3악장은 현악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줄을 퉁기는 피치카토로만 연주하고 그 사이로 목관과 금관만의 대목이 끼어드는 독특한 스케르초로, 오케스트라 작품에서 드문 음색 실험이다.
  • 4악장에는 러시아 민요 '들판에 자작나무가 서 있네'가 그대로 인용되어,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 속에서도 긴장이 가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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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브게니 오네긴 (Op. 24)1879 (39세)노래 Benjamin Bernheim (테너) — 「Kuda, kuda, kuda vi udalilis」

자신의 결혼 전에 쓴 거절 장면이 훗날 현실의 결혼과 기묘하게 겹친 오페라다.

  • 1막 '편지 장면'은 어린 타티야나가 밤새 써 내려간 연서의 심정을 담은 긴 독백으로, 소프라노의 기량을 가늠하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 3막의 폴로네즈는 오페라 바깥에서도 자주 따로 연주되는 화려한 관현악 선곡이다.
  • 마지막 오네긴과 타티야나의 이중창은 처지가 뒤바뀐 두 사람의 재회를 그려, 극 전체의 아이러니를 완성한다.
  • 작곡가는 이 작품을 거창한 드라마 대신 '서정적 장면들'이라 불렀는데, 그 수수함이 오히려 극의 진심을 더 또렷하게 만든다는 평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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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유럽의 명성 · 1878–1884 (38–44세)

(독립) 1878년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직을 그만두고 폰 메크의 후원에 기대 작곡에만 전념했다. 유럽 각지를 돌며 요양과 작곡을 병행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바이올린 협주곡) 1878년 완성한 바이올린 협주곡을 헌정하려 한 레오폴트 아우어는 연주가 불가능하다며 거절했고, 결국 1881년 아돌프 브로드스키가 빈에서 초연했다.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는 "악취 나는 음악을 들려주는 바이올린"이라는 혹평을 남겼지만, 곡은 훗날 가장 사랑받는 바이올린 협주곡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812년 서곡) 1880년, 나폴레옹 격퇴를 기념하는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봉헌을 위해 급히 서곡을 써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완성한 뒤 그는 "시끄럽고 소란스러울 뿐 예술적 가치는 없다"고 스스로 낮춰 말했지만, 이 곡은 생전 예상과 달리 가장 널리 연주되는 작품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죽음) 1881년 니콜라이 루빈스테인이 파리에서 세상을 떠나자 깊이 슬퍼하며 피아노 삼중주 "위대한 예술가를 추억하며"를 작곡했다. 평소 피아노가 낀 삼중주 편성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해 왔지만, 이 곡만은 예외로 두었다. (안목) 유럽을 여행하며 요하네스 브람스와도 만났는데, 작법은 존중했지만 음악이 차갑게 느껴진다고 일기에 적었다. 반대로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에는 깊이 매료되어 거듭 관람했고, 파리 초연 당시 혹평받던 이 작품이 "십 년 안에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오페라가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는데, 이는 그대로 들어맞았다.

♪바이올린 협주곡 (Op. 35)1878 (38세)실황 Hilary Hahn (바이올린) · hr-Sinfonieorchester · Andrés Orozco-Estrada 지휘

헌정하려던 연주자에게마저 거절당했지만, 끝내 가장 사랑받는 바이올린 협주곡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 1악장의 카덴차는 극도로 어려운 더블스토핑(두 줄을 동시에 켜는 주법)과 빠른 패시지로 가득해, '연주 불가능'이라는 당대 평가가 과장만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 2악장 '칸초네타'는 소박하고 노래하듯 흐르는 짧은 선율로, 1악장의 화려함과 뚜렷이 대비된다.
  • 3악장은 러시아 춤곡풍의 빠른 리듬이 쉼 없이 몰아치는 론도 형식으로, 연주자의 지구력을 시험하는 대목으로 유명하다.
  • 민속적인 흥과 고난도 기교가 한 악기 안에서 끊임없이 교차하는 점이 이 곡의 매력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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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클린 정착과 발레의 시대 · 1885–1891 (45–51세)

(정착) 1885년 모스크바 근교의 클린 지역에 자리 잡았다. 많은 사람과 어울리기보다 혼자 산책하고 정원을 가꾸는 조용한 생활을 좋아했고, 이 무렵부터 수입이 안정되어 더는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1888년에는 알렉산드르 3세로부터 종신 연금을 받아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공식 인정받았다. (지휘) 오랫동안 지휘대에 서는 일을 두려워했다 - 지휘봉을 들면 머리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불안에 턱을 손으로 괴고 지휘한 적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주변의 격려로 이 두려움을 차츰 극복하고 1880년대 중반부터 유럽 각지에서 자신의 곡을 직접 지휘하기 시작했다. (발레) 제국극장 감독 이반 프세볼로시스키의 의뢰로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와 함께 1889년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완성해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는 발레 음악을 가벼운 오락에서 진지한 예술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았다. 1892년에는 호프만의 동화를 바탕으로 한 호두까기 인형을 완성했는데, 설탕 요정의 춤에 쓸 악기로 파리에서 막 발명된 첼레스타를 몰래 들여왔다 - 경쟁 작곡가들이 먼저 쓰기 전에 러시아에서 자신이 처음으로 이 악기를 선보이기 위해서였다. (이별) 1890년 폰 메크는 뚜렷한 설명 없이 갑작스레 후원과 편지를 모두 끊었다. 집안 사정을 이유로 들었지만 정확한 사정은 지금도 분명하지 않다. 경제적으로는 이미 자립한 뒤였지만, 13년을 나눈 내밀한 관계가 하루아침에 끊어진 데 그는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같은 해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을 집착과 도박, 운명을 주제로 빠르게 완성했다. (상실) 1891년, 평생 가장 가까웠던 여동생 사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샤의 아들이자 자신에게는 조카인 블라디미르 '밥' 다비도프에게 한층 더 깊이 의지하게 되었다.

♪호두까기 인형 (Op. 71)1892 (52세)실황 Rotterdams Philharmonisch Orkest · 네젯세갱 지휘

경쟁자보다 먼저 쓰려고 첼레스타를 몰래 들여온 일화가 담긴 발레로, 그의 말년을 대표하는 밝은 작품이다.

  • '설탕 요정의 춤'에서 울리는 맑고 영롱한 종소리 같은 음색이 첼레스타인데, 이 곡을 통해 이 악기의 음색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 '꽃의 왈츠'는 하프가 흐르듯 음을 훑어 내리는 글리산도로 시작해, 곧이어 오케스트라 전체가 화려한 왈츠로 이어받는다.
  • '러시안 춤(트레파크)'은 빠르고 숨 가쁘게 몰아치는 리듬으로, 짧지만 강렬한 에너지를 보여 준다.
  • '아라비안 춤'은 낮게 지속되는 음(드론) 위로 느리고 이국적인 선율이 흐르며, 다른 춤곡들과 분위기가 또렷이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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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 비창과 죽음 · 1891–1893 (51–53세)

(인정) 1891년 뉴욕 카네기홀 개관 연주회에 초청되어 지휘봉을 잡았고, 1893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 그리그, 생상스 등과 나란히 이름을 올린 자리였다. 러시아를 넘어 유럽과 미국에서도 그의 이름은 확고했다. (비창) 1893년 교향곡 6번 나단조를 완성해 조카 밥 다비도프에게 헌정했다. 통상적인 교향곡과 달리 화려한 종악장 대신 느리고 가라앉은 악장으로 막을 내리는 구성을 택했는데, 음악이 거의 들리지 않을 때까지 잦아드는 마지막 장면은 많은 이에게 작별 인사처럼 들렸다. 어떤 표제가 있느냐는 물음에 그는 "있지만 밝히지 않겠다"고만 답했다. (죽음) 1893년 10월 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 교향곡을 직접 초연한 지 아흐레 만인 11월 6일, 그는 세상을 떠났다. 공식적인 사인은 콜레라 유행 중 끓이지 않은 물을 마신 데 따른 발병이었다. 다만 장례가 서둘러 치러진 정황과 모데스트의 엇갈린 증언 등을 근거로, 한 귀족과의 염문을 덮기 위해 옛 동급생들로 이루어진 '명예 법정'이 비소를 먹여 자살을 강요했다는 설이 20세기 후반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확실한 근거는 없고, 오늘날 대다수 전기 작가는 콜레라 사망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장례) 그의 죽음은 러시아 전역에 깊은 슬픔을 안겼고, 장례식에는 수천 명이 몰려 그가 한 개인을 넘어 러시아 음악 그 자체로 여겨졌음을 보여 주었다.

♪교향곡 6번 '비창' (Op. 74)1893 (53세)지휘 Klaus Mäkelä

초연 아흐레 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많은 이에게 작별 인사처럼 들리게 된 마지막 교향곡이다.

  • 4악장 '아다지오 라멘토소'는 빠르고 화려하게 끝나는 보통의 교향곡 공식을 깨고 느리게 잦아들며 마무리되는데, 이 구성 자체가 이례적이어서 자주 작별의 메시지로 해석된다.
  • 1악장 후반에 나오는 서정적인 두 번째 주제는 뒤에서도 변형되어 돌아오며 곡 전체를 감정적으로 이어 준다.
  • 3악장은 힘차고 축제적인 행진곡풍으로 끝나, 실제 연주회에서 관객이 이를 종악장으로 착각해 박수를 치는 일이 잦은 것으로 유명하다.
  • 표제가 있느냐는 질문에 작곡가는 있지만 밝히지 않겠다고 답했는데, 그 침묵이 오늘날까지 이 곡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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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알려진 이야기

지휘대에 설 때마다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갈 것 같다는 불안에 시달렸다는 이야기는 그의 편지와 동시대인의 회고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실제로 초기에는 턱을 손으로 받친 채 지휘하거나 지휘를 아예 피했는데, 이런 신경증적인 면모는 화려한 교향곡 작곡가라는 이미지와 잘 어울리지 않아 대중적인 전기에서는 자주 생략된다. 호두까기 인형의 설탕 요정 춤에 쓰인 첼레스타는 사실 그가 경쟁자를 의식해 벌인 작은 신경전의 산물이었다. 그는 파리에서 이 악기를 발견하자마자 출판업자에게 편지를 보내, 림스키코르사코프나 글라주노프가 먼저 듣고 베끼지 못하도록 조용히 러시아로 들여와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음악사에 남을 장면 뒤에는 이런 치기 어린 경쟁심도 있었다. 그는 모차르트를 거의 신앙처럼 떠받들었다. 폰 메크에게 보낸 1878년 편지에 "내가 음악에 삶을 바친 것은 모차르트 덕분"이라고 적었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모차르트가 살던 18세기를 택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1887년에는 모차르트의 소품들을 관현악으로 편곡한 모음곡 '모차르티아나'를 직접 만들어 존경을 표현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교향곡들에 비해 지금도 덜 알려진 편이다. 죽음을 둘러싼 논란은 소련 시절 한층 복잡해졌다. 그의 성적 지향과 관련된 편지와 일기 상당 부분은 공식 전기를 관리하던 유족과 출판사에 의해 오랫동안 편집되거나 숨겨졌고, 원문이 온전히 공개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나고도 한참 뒤인 20세기 말에 이르러서였다. 그 탓에 그의 삶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까지도 계속 다시 쓰이고 있다.

용어 노트 📚🔎

환상서곡

(말뜻) 환상(幻想)은 마음대로 떠올리는 상상이라는 뜻이고, 서곡(序曲)은 원래 연극이나 오페라를 열기 전에 연주하는 곡을 가리킨다. 두 말을 합치면 '정해진 틀 없이 자유롭게 상상을 펼친, 독립된 서곡 형식의 곡'이라는 뜻이 된다. (음악에서) 오페라의 도입부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된 연주회용 작품이면서, 소설이나 희곡의 줄거리를 음악으로 그려 내는 곡을 말한다. 학교 연극의 줄거리를 대사 없이 음악만으로 들려준다고 상상하면 된다 - 인물의 등장, 다툼, 화해의 장면이 선율과 리듬의 변화로 나타난다. (다른 데서는) 환상은 게임이나 영화 장르에서 '판타지'라는 말로도 쓰이지만, 음악의 환상곡은 장르가 아니라 형식이 자유롭다는 뜻에 가깝다.

표제음악

(말뜻) 표제(標題)는 책이나 글에 붙이는 제목을 뜻한다. 표제음악은 말 그대로 '이야기나 장면을 밝히는 제목이 붙은 음악'이다. (음악에서) 곡 자체에 특정한 이야기, 풍경,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겠다는 의도가 담긴 음악을 말한다. 반대말은 제목이 그저 '교향곡 몇 번'처럼 형식만 가리키는 절대음악이다. 그림일기에 제목을 적듯, 작곡가가 '이건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다'라고 미리 알려 주면 듣는 사람은 그 실마리를 따라가며 음악을 상상하게 된다.

피치카토

(말뜻) 이탈리아어 '피치카레(pizzicare)'에서 왔는데, '꼬집다, 뜯다'라는 뜻이다. (음악에서) 바이올린이나 첼로 같은 현악기를 활로 긋지 않고 손가락으로 줄을 직접 퉁겨서 소리 내는 주법이다. 기타를 치듯 현을 손으로 뜯는 셈인데, 활로 그을 때보다 소리가 짧고 통통 튀는 느낌을 준다. 고무줄을 당겼다 놓을 때 나는 소리를 떠올리면 비슷하다.

첼레스타

(말뜻) 이탈리아어로 '하늘의, 천상의'라는 뜻인 '첼레스테(celeste)'에서 이름을 따왔다. (음악에서) 피아노처럼 건반을 눌러 연주하지만, 줄이 아니라 작은 금속판을 망치로 때려 소리를 내는 악기다. 소리가 맑고 영롱해서 실로폰과 오르골 소리를 섞어 놓은 듯하게 들린다. 1886년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신생 악기였는데, 차이콥스키가 자신의 발레 음악 호두까기 인형에 써서 유명해졌다.

아다지오

(말뜻) 이탈리아어로 '편안하게, 느긋하게'라는 뜻의 'ad agio'에서 나온 말이다. (음악에서) 느린 속도로 연주하라는 지시어이면서, 그 자체로 '느린 악장'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달리기로 치면 전력 질주가 아니라 산책하듯 걷는 속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 서두르지 않고 한 음 한 음의 울림을 충분히 느끼게 한다.

모음곡

(말뜻) 모음곡은 '모으다'와 '곡'을 합친 말 그대로, 여러 짧은 곡을 모아 하나로 묶은 곡이라는 뜻이다. 영어 'suite'도 '뒤이어 따라오는 것들'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에서 왔다. (음악에서) 발레나 오페라에서 따로 쓰인 여러 곡 가운데 인기 있는 부분들을 골라, 연주회에서 따로 연주할 수 있도록 다시 엮은 곡을 말한다. 좋아하는 노래들만 모아 만드는 재생목록과 비슷하다 - 원래 긴 이야기의 일부지만, 알짜만 추려서 따로 즐길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다른 데서는) 호텔의 '스위트룸'도 같은 어원이다 - 방 여러 개가 이어져 한 세트를 이루는 공간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