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acomo Puccini
“전능하신 신께서 새끼손가락으로 나를 건드리며 말씀하셨다. ‘극장을 위해 써라. 명심해라, 오직 극장만을 위해.’”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곁의 사람들 ⏳🌊
- 스승카를로 안젤로니
루카 파치니 음악원에서 오페라 악보를 함께 읽으며 그를 극음악에 눈뜨게 했다.
- 스승아밀카레 폰키엘리
밀라노 음악원의 스승으로, 첫 오페라 「빌리」의 대본가를 이어 주었다.
- 우정피에트로 마스카니
밀라노에서 한방을 쓰며 가난을 나눈 동료였고, 훗날 베리스모 시대의 동료이자 맞수가 되었다.
- 후원줄리오 리코르디
「에드가」 실패 뒤에도 생활비를 대며 그를 지켜 낸 출판업자이자 조언자였다.
- 가족엘비라 본투리
18년 동거 끝에 아내가 된 평생의 반려로, 사랑만큼 질투와 갈등도 깊었다.
- 경쟁루제로 레온카발로
「마농 레스코」 대본에 손을 보탰으나 같은 소재의 「라 보엠」을 두고 갈라섰다.
I. 루카의 다섯째 대 · 1858–1880 (0–22세)
(가문) 1858년 12월, 토스카나 대공국(오늘날 이탈리아) 루카에서 태어났다. 정식 이름은 자코모 안토니오 도메니코 미켈레 세콘도 마리아 푸치니였다. 18세기 초 고조부 자코모 이래 4대에 걸쳐 루카 산 마르티노 대성당의 음악을 맡아 온 집안이었고, 그는 그 다섯째 대였다. 아버지 미켈레와 어머니 알비나 마지 사이에는 딸이 여럿이었고, 그는 그 사이에서 난 첫 아들이었다. (상실) 1864년 1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다섯 살이었다. 시 당국은 성당 악장 자리를 그가 자랄 때까지 남겨 두기로 하고 외삼촌 포르투나토 마지에게 임시로 맡겼다. 그해 여름 막내 미켈레가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적은 연금으로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장남만큼은 음악가로 만들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방황) 외삼촌에게 받은 첫 수업은 순탄치 않았다. 마지는 조카를 재능 없는 학생으로 여겼다고 전해진다. 그는 열 살 무렵부터 성가대에서 노래하고 인근 교회에서 오르간을 쳐 살림을 도왔지만, 학교 성적은 좋지 않았다. 파치니 음악원에서 카를로 안젤로니를 만나 오페라 악보를 함께 읽으면서 비로소 음악에 마음을 붙였다. (아이다) 1876년 3월, 그는 친구들과 피사까지 걸어가 베르디의 「아이다」를 보았다. 훗날 그는 이 공연으로 음악의 창이 열렸다고 회고했다. 교회 오르가니스트의 길 대신 오페라가 목표가 되었다. 1880년 졸업 작품으로 쓴 「4성부 미사」는 고향 성당의 축일에 초연되어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미사곡 곳곳에 이미 극장의 숨결이 배어 있었고, 그의 시선은 밀라노를 향해 있었다.
음악원 졸업 작품으로 고향 성당 축일에 초연된 곡으로, 「아이다」를 보고 오페라를 꿈꾸게 된 청년의 극적 감각이 이미 미사 안에 배어 있다.
- 「글로리아」는 미사 전체에서 가장 길고, 밝은 행진풍 주제가 되풀이되며 축제처럼 부풀어 오른다. 성당 음악보다 오페라 합창에 가까운 활기가 오늘날의 별명을 낳았다.
- 「글로리아」 끝의 '쿰 상크토 스피리투'는 여러 성부가 같은 주제를 차례로 이어받는 푸가(돌림노래처럼 쫓아가는 형식)다. 음악원에서 갈고닦은 기교를 보여 주는 대목이니 각 성부가 들어오는 순간을 따라가 보자.
- 「크레도」의 '크루치픽수스(십자가에 못 박히시고)'는 바리톤 독창이 낮고 어두운 음색으로 부른다. 바로 뒤 부활을 노래하는 밝은 합창과 대비해 들으면 좋다.
- 「아뉴스 데이」의 선율은 13년 뒤 「마농 레스코」 2막의 마드리갈(여러 성부가 부르는 세속 노래)로 다시 쓰였다. 두 곡을 나란히 들으면 아껴 둔 선율을 옮겨 쓰는 그의 습관이 보인다.
II. 밀라노의 하숙방 · 1880–1884 (22–26세)
(장학금) 밀라노 음악원에 가려면 돈이 필요했다. 어머니가 마르게리타 왕비에게 청원해 1년 치 장학금을 얻었고, 의사였던 종조부 니콜라오 체루가 나머지를 보탰다. 1880년 가을 입학한 그는 안토니오 바치니와 「라 조콘다」의 작곡가 아밀카레 폰키엘리에게 배웠다. (궁핍) 학생 시절은 가난했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콩 수프와 청어로 끼니를 잇는 사정과 밀린 하숙비 이야기가 담겼다. 1882년 입학한 리보르노 출신 피에트로 마스카니와 한방을 쓰며, 집주인이 금지한 요리를 옷장 뒤에서 몰래 해 먹고 빚쟁이를 피했다는 일화가 남았다. 담배와 카페에서의 수다는 이때부터 평생의 습관이 되었다. (빌리) 1883년 졸업 작품 「교향적 카프리치오」가 호평을 받자, 폰키엘리는 그를 대본가 페르디난도 폰타나에게 소개했다. 둘은 출판업자 손조뇨의 단막 오페라 공모전에 「빌리」를 냈지만 입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리고 보이토 등이 비용을 모아 1884년 5월 달 베르메 극장에서 무대에 올렸고, 공연은 성공했다. 출판업자 줄리오 리코르디가 판권을 사고 새 오페라를 의뢰했다. 베르디는 이해 한 편지에서 푸치니라는 젊은이에 대해 좋은 말을 많이 듣는다고 적으면서도, 교향적 요소가 앞서는 듯하니 조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어머니) 기쁨은 짧았다. 1884년 7월 어머니 알비나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오랫동안 어머니의 죽음을 가장 큰 상처로 여겼다. 같은 무렵 루카에서 그에게 음악을 배우던 유부녀 엘비라 본투리와 사랑에 빠졌다. 엘비라는 상인 나르치소 제미냐니의 아내였고, 두 사람의 관계는 작은 고향 도시에서 큰 추문이 되었다.
III. 실패와 빚, 그리고 마농 · 1884–1893 (26–35세)
(동거) 1886년 엘비라는 남편을 떠나 딸 포스카를 데리고 그에게 왔다. 그해 12월 몬차에서 아들 안토니오가 태어났다. 이혼이 허용되지 않던 시절이라 두 사람은 결혼할 수 없었고, 가족도 이 관계를 반기지 않았다. 그들은 이후 17년 넘게 법적으로 맺어지지 못한 채 함께 살았다. (에드가) 리코르디가 의뢰한 두 번째 오페라 「에드가」는 1889년 라 스칼라에서 미지근한 반응을 얻었다. 회사 안에서도 그를 포기하자는 말이 나왔으나 리코르디는 매달 생활비를 대며 그를 지켰다. 같은 해 리코르디는 그를 바이로이트로 보내, 라 스칼라에서 공연할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에서 덜어 낼 부분을 정하게 했다. 바그너의 관현악과 라이트모티프 쓰는 법은 그의 음악에 오래 흔적을 남겼다. (곤궁) 1889년 아르헨티나로 떠난 동생 미켈레는 1891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황열병으로 숨졌다. 그는 여전히 리코르디의 선금으로 버티는 처지였다. 1890년에는 옛 룸메이트 마스카니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로 하룻밤 사이 이름을 떨치며 서민의 격정을 그리는 베리스모 바람을 일으켰다. 같은 해 아오스타 공작의 죽음에 붙여 쓴 현악 사중주 「국화」의 애도 선율은 훗날 「마농 레스코」 마지막 막에 다시 쓰였다. (마농) 1891년 그는 루카 근처 마사추콜리 호숫가 마을 토레 델 라고에 자리를 잡고, 사냥과 낚시 틈틈이 「마농 레스코」를 완성했다. 대본에는 레온카발로를 포함해 다섯 명 이상이 손을 댔다. 마스네가 이미 같은 소설로 오페라를 썼다는 지적에 그는 마스네는 프랑스인답게 분가루와 미뉴에트로 느끼겠지만 자신은 이탈리아인답게 절망적인 열정으로 느끼겠다고 답했다. 1893년 2월 토리노 레조 극장 초연은 대성공이었고, 그는 마침내 빚에서 벗어났다.
에드가의 실패와 동생의 죽음, 빚을 지나 얻은 첫 대성공으로, '절망적인 열정'으로 느끼겠다던 그의 말이 마지막 막까지 이어진다.
- 1막 데그리외의 아리아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본 적이 없다(Donna non vidi mai)'는 첫눈에 반한 순간을 높이 솟구치는 선율로 그린다.
- 3막 앞의 간주곡(막과 막 사이에 오케스트라만 연주하는 곡)은 체포된 마농을 따라 르아브르로 가는 여정을 그린다. 그는 악보에 원작 소설의 한 구절을 적어 두었고, 첼로 독주에서 시작한 노래가 오케스트라 전체로 번져 간다.
- 4막 '홀로, 버려지고(Sola, perduta, abbandonata)'는 사막에서 죽어 가는 마농의 아리아로, 소프라노에게 체력과 극적 표현을 모두 요구해 명연 비교가 자주 이루어진다.
- 4막에는 현악 사중주 「국화」의 애도 선율이 녹아 있다. 사중주를 먼저 듣고 오페라를 들으면 그 선율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다.
IV. 보헤미안들 · 1893–1900 (35–42세)
(보엠) 리코르디는 루이지 일리카와 주세페 자코사를 그의 전담 대본가로 묶었다. 일리카가 줄거리와 장면을 짜고 자코사가 시구를 다듬었는데, 그는 리브레토(대본)를 한 줄씩 고치게 해 두 사람을 지치게 했다. 앙리 뮈르제의 소설에서 가져온 「라 보엠」은 파리 다락방의 가난한 예술가들 이야기였다. 밀라노에서 그 자신이 겪은 하숙방 시절이 곳곳에 겹쳤다. (경쟁) 1893년 3월, 레온카발로가 신문에 자신이 「라 보엠」을 쓰고 있다고 밝히자 그도 다음 날 다른 신문에 같은 작업을 공표했다. 「마농 레스코」 대본을 함께 다듬었던 두 사람의 우정은 여기서 끝났다. 1896년 2월 토리노에서 젊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초연된 그의 「라 보엠」은 평단의 반응이 엇갈렸지만 곧 세계로 퍼졌다. 1897년 베네치아에서 초연된 레온카발로의 작품은 점차 무대에서 밀려났다. (호숫가) 수입이 늘자 그는 토레 델 라고에 집을 짓고, 화가 친구들과 오두막에 '클럽 라 보엠'을 꾸려 카드놀이와 사냥을 즐겼다. 오리 사냥은 평생의 즐거움이었고, 자동차와 모터보트 같은 새 기계도 좋아했다. 다만 엘비라의 질투와 그의 바람기가 부딪치며 집안 공기는 자주 무거웠다. (토스카) 다음 작품은 사르두의 연극 「토스카」였다. 판권은 처음 작곡가 알베르토 프란케티에게 있었으나 리코르디가 설득해 넘겨받았다. 그는 3막 새벽 장면을 위해 로마 성당들의 종소리 음높이를 알아보고, 목동의 노래 가사를 로마 방언으로 쓰게 했다. 1900년 1월 로마 코스탄치 극장 초연은 비평가들의 냉담한 평에도 관객의 환호를 받았다.
밀라노 하숙방에서 마스카니와 가난을 나누던 시절이 파리 예술가들의 웃음과 눈물로 옮겨졌다.
- 1막 로돌포의 '그대의 찬 손(Che gelida manina)' 끝의 높은 도(하이 C)는 테너들의 시험대다. 반음 낮춰 부르는 관행도 있어 연주마다 비교해 들을 만하다.
- 미미의 '내 이름은 미미(Sì, mi chiamano Mimì)'는 수놓는 일상을 담담히 이야기하다가, 봄이 오면 햇살이 자기 것이 된다는 대목에서 선율이 크게 피어난다.
- 3막 첫머리, 눈 내리는 새벽의 파리 관문을 플루트와 하프가 가운데 음을 뺀 텅 빈 울림(빈 5도)으로 그린다. 눈송이가 떨어지는 듯한 차가운 정적에 귀 기울여 보자.
- 4막 미미가 숨을 거둔 뒤 로돌포가 '미미!'를 외치고, 오케스트라가 그녀의 선율을 아주 크게(포르티시모) 다시 울리며 막이 내린다.
로마의 종소리와 방언까지 확인한 집요함이, 사랑과 권력과 죽음이 뒤엉킨 하루를 사실처럼 무대에 세웠다.
- 막이 오르자마자 울리는 세 개의 무거운 화음은 경찰총감 스카르피아의 라이트모티프(인물을 대표하는 짧은 음악)다. 서로 먼 조의 화음이 연달아 부딪쳐 불길함을 만든다.
- 1막 끝 '테 데움'에서는 성당 합창과 오르간, 대포 소리 위로 스카르피아가 토스카를 향한 욕망을 노래한다. 신성함과 악이 한 장면에 겹치는 대목이다.
- 2막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Vissi d'arte)'는 극이 멈추고 토스카가 신에게 묻는 기도다. 그는 극의 흐름을 끊는다며 이 아리아를 빼고 싶어 했다고 전해진다.
- 3막 새벽, 목동의 노래와 로마 곳곳의 종소리가 겹친 뒤 클라리넷이 카바라도시의 '별은 빛나건만(E lucevan le stelle)' 선율을 먼저 노래한다.
V. 사고와 결혼, 나비부인 · 1900–1908 (42–50세)
(나비) 1900년 여름 「토스카」의 런던 공연을 보러 갔다가 데이비드 벨라스코의 연극 「나비부인」을 보았다. 영어를 거의 몰랐지만 그는 무대에 깊이 감동했다. 일본 음악을 알기 위해 악보와 음반을 구하고, 주이탈리아 일본 공사의 부인 오야마 히사코를 만나 노래를 듣고 이름과 풍습을 물었다. 이렇게 모은 선율과 5음 음계가 작품 곳곳에 스며들었다. (사고) 1903년 2월, 루카에서 돌아오던 밤 그의 자동차가 길 밖으로 굴렀다. 다리가 부러진 그는 여러 달 누워 지냈고, 상처가 더디 낫는 까닭을 찾다가 당뇨병이 발견됐다. 거의 같은 무렵 엘비라의 남편 제미냐니가 세상을 떠났다. 1904년 1월, 두 사람은 함께 산 지 18년 만에 정식으로 결혼했다. (야유) 1904년 2월 라 스칼라의 「나비부인」 초연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처참한 밤이었다. 객석은 고함과 휘파람으로 가득했고, 조직적인 방해가 있었다는 말도 돌았다. 그는 공연을 곧바로 거두고 작품을 고쳤다. 지나치게 긴 2막을 둘로 나누고 여러 대목을 손본 판본이 그해 5월 브레시아에서 크게 성공했다. 그는 이 작품을 자신이 쓴 가장 진실하고 감정이 풍부한 오페라라고 불렀다. (우정) 1904년 런던에서 그는 은행가의 아내 시빌 셀리그먼을 만났다. 관계는 곧 평생의 우정이 되었다. 그는 시빌에게 작품 구상과 집안의 걱정을 털어놓았고, 시빌은 영어권 원작을 추천하고 그의 편지를 받아 주는 가장 믿을 만한 상담자가 되었다. 성공한 뒤에도 그는 늘 다음 작품의 소재를 찾지 못할까 두려워했고, 그 불안을 가장 자주 들은 사람이 시빌이었다.
교통사고와 병상, 라 스칼라의 야유를 거쳐 브레시아에서 되살아난 작품으로, 그가 가장 아낀 오페라였다.
- 일본 국가 「기미가요」 같은 일본 선율이 곳곳에 섞여 있다. 한 옥타브를 다섯 음으로만 짠 5음 음계가 나오는 대목을 찾아 들어 보자.
- 미국 해군 장교 핀커턴의 주변에서는 미국 국가 「성조기」의 첫 소절이 울린다. 일본 선율과 대비되는 이 인용이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미리 들려준다.
- 2막 '어느 갠 날(Un bel dì vedremo)'은 남편이 돌아올 날을 눈앞에 그리는 아리아로, 아주 여리게 시작해 끝에서 크게 터진다.
- 밤새 남편을 기다리는 장면의 '허밍 코러스'는 무대 뒤 합창이 입을 다문 채 허밍으로 노래한다. 가사 없는 노래가 기다림의 정적을 만든다.
VI. 비극을 지나서 · 1908–1918 (50–60세)
(도리아) 1908년 가을, 엘비라는 몇 해째 집안일을 돕던 젊은 하녀 도리아 만프레디가 남편과 관계를 맺었다고 의심해 마을에 공공연히 비난하고 다녔다. 1909년 1월 도리아는 독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고, 부검 결과 결백이 드러났다. 유족의 고소로 엘비라는 그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유족에게 1만 2천 리라를 지급했고, 고소는 항소심 전에 취하됐다. 그는 몇 달 동안 거의 작곡하지 못했고, 부부 사이에는 깊은 금이 갔다. (서부) 그 시기를 지나 완성한 「서부의 아가씨」는 다시 벨라스코의 연극이 원작이었다. 1910년 12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토스카니니의 지휘와 엔리코 카루소의 노래로 초연되었다. 그는 1906년 그라츠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를 직접 보았고 드뷔시의 화성에도 귀를 기울였다. 이 작품의 관현악은 한층 대담해졌고, 범죄자를 용서하고 구원하는 결말은 그 무렵 그의 마음과 무관하지 않았다. (전쟁) 1913년 빈의 한 극장이 오페레타를 의뢰했으나,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와 전쟁에 들어가며 계약은 꼬였다. 결국 그는 이 곡을 오페라 「제비」로 바꿔 1917년 몬테카를로에서 초연했다. 프랑스 언론은 적국과 손잡았다며 그를 공격했고, 전쟁에 대한 그의 미온적인 태도 때문에 열렬한 애국자였던 토스카니니와도 한동안 사이가 틀어졌다. (삼부작) 1918년 12월 메트로폴리탄에서 단막 오페라 세 편을 묶은 「일 트리티코」가 초연되었다. 전쟁 중이라 그는 대서양을 건너지 못했다. 센강 뱃사공의 치정극 「외투」, 수녀원의 비극 「수녀 안젤리카」, 단테의 『신곡』에서 가져온 희극 「잔니 스키키」였다. 그는 수녀가 된 누이 이지니아의 수녀원을 찾아 「수녀 안젤리카」를 피아노로 들려주었고, 수녀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도리아 사건과 전쟁, 토스카니니와의 불화가 이어진 어두운 시기에 그는 오히려 가장 유쾌한 희극을 썼다.
- 라우레타의 '오 사랑하는 아버지(O mio babbino caro)'는 2분 남짓한 짧은 노래지만 그의 가장 유명한 선율이 되었다. 결혼을 허락해 달라며 아버지를 조르는, 반은 진심이고 반은 연기인 노래로 들으면 재미있다.
- 리누초의 '피렌체는 꽃 핀 나무처럼(Firenze è come un albero fiorito)'은 바깥에서 온 새 사람들이 피렌체를 빛냈다며 조토와 메디치 가문을 부른다. 시골 출신 스키키를 감싸 주는 노래다.
- 스키키가 죽은 부오소 흉내를 내며 유언을 받아 적게 할 때, 들키면 손이 잘리고 쫓겨난다는 경고를 담은 '안녕, 피렌체' 구절이 거듭 돌아와 욕심 많은 친척들을 겁준다.
- 마지막에 스키키는 노래를 멈추고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단테는 자신을 지옥에 넣었지만 여러분이 즐거웠다면 정상을 참작해 달라는 대사다.
VII. 끝나지 않은 이중창 · 1919–1924 (61–66세)
(비아레조) 1921년 토레 델 라고 근처에 이탄 공장이 들어서자 그는 소음과 연기를 피해 바닷가 비아레조로 옮겼다. 이 무렵 그는 세상의 음악이 자신을 지나쳐 가고 있다는 불안을 자주 털어놓았다. 1924년 4월에는 피렌체까지 가서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를 주의 깊게 듣고 작곡가와 인사를 나누었다. (투란도트) 마지막 작품은 카를로 고치의 우화극에서 가져온 「투란도트」였다. 그는 대본가 주세페 아다미와 레나토 시모니에게 끝없이 수정을 요구했다. 중국 음악을 알기 위해 친구 파시니 남작이 가진 중국 오르골의 선율을 받아 적었다. 그러나 얼음 같은 공주가 사랑으로 녹는 마지막 이중창에 이르러 작업은 멈췄다. 그는 이중창이 풀리지 않는다는 편지를 거듭 보냈다. (병) 1923년 말부터 목의 통증과 기침이 이어졌다. 평생 담배를 놓지 않았던 그는 1924년 가을 후두암 진단을 받았다. 같은 해 그는 종신 상원의원에 임명되었다. 11월 아들 안토니오와 함께 벨기에 브뤼셀로 가 라듐 치료를 받았고, 수술은 처음엔 잘 견디는 듯했으나 11월 29일 심장 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65세였다. 마지막 장면을 위한 스케치 36장이 남았다. (완성) 프랑코 알파노가 스케치를 바탕으로 결말을 이었다. 1926년 4월 라 스칼라 초연에서 토스카니니는 류의 죽음 장면에서 지휘를 멈추고, 거장은 여기서 펜을 놓았다고 객석에 말했다. 그의 유해는 같은 해 토레 델 라고 집 안의 예배당에 안장되었다. 엘비라는 1930년에, 아들 안토니오는 1946년에 세상을 떠났고, 안토니오는 그때까지 아버지의 유산을 지켰다.
마지막 이중창을 끝내지 못한 채 병으로 쓰러져, 류의 죽음 장면이 그가 완성한 마지막 음악으로 남았다.
- 1막 어린이 합창에는 파시니 남작의 오르골에서 얻은 중국 민요 「모리화(재스민 꽃)」 선율이 쓰였고, 이 선율은 공주 투란도트를 나타내는 주제로 오페라 내내 돌아온다.
- 2막 수수께끼 장면은 공주가 내는 세 문제와 칼라프의 대답이 이어지며 긴장이 한 계단씩 올라간다. 문제마다 합창과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들어 보자.
- 3막 '아무도 잠들지 마라(Nessun dorma)'는 마지막 '빈체로(이기리라)'의 높은 음으로 유명하다. 이 음을 악보보다 길게 끄는 테너가 많아 연주마다 차이가 난다.
- 3막 류의 아리아 '얼음에 싸인 그대여(Tu che di gel sei cinta)'와 그 죽음까지가 푸치니의 손이다. 그 뒤 알파노가 이은 부분과 관현악의 결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들어 보자.
덜 알려진 이야기
(제목) 오늘날 「메사 디 글로리아」로 불리는 미사는 작곡가가 붙인 이름이 아니다. 그는 1880년 초연 뒤 이 곡을 출판하지 않고 일부 선율만 「에드가」와 「마농 레스코」에 옮겨 썼다. 전곡은 잊혔다가 1950년대 초 미국에서 사제 단테 델 피오렌티노가 사본을 찾아 다시 연주하면서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종소리) 「토스카」 3막의 종소리는 어림짐작이 아니었다. 그는 로마의 사제 피에트로 파니켈리에게 편지를 보내 성 베드로 대성당 큰 종의 정확한 음높이와 새벽 기도 시각을 물었다. 이 과정은 파니켈리가 뒷날 펴낸 회고록에 남아 있어, 전기의 본문보다 각주에서 더 자주 만나는 이야기가 되었다. (결말) 흔히 듣는 「투란도트」의 결말은 알파노가 처음 쓴 것이 아니다. 토스카니니와 리코르디 사는 알파노의 원래 결말이 길고 스케치에서 멀다며 크게 줄이게 했고, 줄인 판본이 표준이 되었다. 원래 결말은 1980년대에 들어서야 다시 연주·녹음되었고, 2002년에는 루치아노 베리오가 같은 스케치로 새 결말을 썼다. (만프레디) 도리아 사건에도 뒷이야기가 있다. 2000년대 후반 영화감독 파올로 벤베누티가 만프레디 집안에 전해 온 문서를 조사해, 푸치니가 실제로 관계를 맺은 사람은 도리아가 아니라 그녀의 사촌 줄리아였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집안 자료가 한 세기 가까이 공개되지 않았기에 이전 전기에는 실릴 수 없었던 해석이다.
용어 노트 📚🔎
미사
(말뜻) 라틴어 미사(missa)는 예식 끝에 사제가 "가십시오, 파견되었습니다(Ite, missa est)"라고 말하는 데서 온 이름이다. (음악에서) 가톨릭 예식에서 늘 같은 기도문—키리에, 글로리아, 크레도, 상투스, 아뉴스 데이—에 곡을 붙인 큰 합창곡이다. 가사가 정해져 있어서 작곡가마다 같은 글을 얼마나 다르게 표현하는지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반마다 같은 교가를 부르는데도 반 분위기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 것과 비슷하다. (다른 데서는) 일상에서 미사는 음악 작품이 아니라 성당에서 드리는 예배 의식 자체를 가리킨다.
아리아
(말뜻) 이탈리아어로 '공기, 바람'이라는 뜻이고, 거기서 '가락, 노래'라는 뜻이 나왔다. (음악에서) 오페라에서 한 등장인물이 이야기 진행을 잠시 멈추고 자기 감정을 길게 노래하는 독창곡이다. 줄거리를 빠르게 전하는 부분과 달리 한 감정에 오래 머문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속마음 독백이 클로즈업으로 길게 나오는 장면과 비슷하다.
리브레토
(말뜻) 이탈리아어로 '작은 책'이라는 뜻이다. 관객이 공연 중 가사를 따라 읽도록 작은 책자로 팔던 데서 이름이 왔다. (음악에서) 오페라의 대본, 곧 노래 가사와 줄거리를 적은 글이다. 쓰는 사람을 대본가(리브레티스트)라 부른다. 푸치니는 대본가에게 한 줄씩 다시 고쳐 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한 작곡가로 유명했다. 학예회 연극을 준비할 때 먼저 대본을 쓰고 거기에 노래를 붙이는 순서와 같다.
베리스모
(말뜻) 이탈리아어 vero(진실)에서 나온 말로 '사실주의'라는 뜻이다. (음악에서) 19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신화나 왕 대신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질투·폭력을 생생하게 그린 오페라 경향이다.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와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가 대표작이고, 푸치니의 「토스카」와 「외투」도 이 흐름에 닿아 있다. 판타지 영화 대신 우리 동네에서 일어날 법한 일을 다룬 드라마를 보는 것과 비슷하다. (다른 데서는) 문학에서는 조반니 베르가 같은 이탈리아 작가들의 사실주의 소설 경향을 가리킨다.
라이트모티프
(말뜻) 독일어 Leitmotiv로, '이끄는(leiten) 동기'라는 뜻이다. (음악에서) 특정 인물·물건·감정이 나올 때마다 되풀이되는 짧은 음악 조각이다. 바그너가 크게 발전시켰고, 푸치니도 「토스카」의 스카르피아 화음처럼 이 방법을 썼다. 게임에서 보스가 나올 때마다 같은 음악이 깔려 '그가 왔다'를 먼저 알려 주는 것과 같다. (다른 데서는) 일상에서는 어떤 사람의 삶이나 작품에 되풀이되는 중심 주제를 비유적으로 가리킬 때 쓴다.
5음 음계
(음악에서) 한 옥타브 안에서 다섯 음만 쓰는 음계다. 피아노의 검은 건반만 차례로 누르면 바로 5음 음계가 된다. 동아시아 민요에 많이 쓰여서, 푸치니는 「나비부인」과 「투란도트」에서 일본과 중국의 분위기를 내려고 이 음계를 썼다. 우리 민요 「아리랑」도 대체로 이런 음계로 되어 있어서, 검은 건반만으로 비슷하게 쳐 볼 수 있다.
푸가
(말뜻) 라틴어와 이탈리아어로 '도망, 달아남'이라는 뜻이다. 한 성부가 달아나면 다른 성부가 뒤쫓는 모습에서 나온 이름이다. (음악에서) 하나의 주제를 여러 성부가 차례로 이어받으며 겹겹이 쌓아 가는 형식이다. 돌림노래에서 뒷사람이 같은 가락을 늦게 따라 부르는 것과 비슷하지만, 푸가는 따라 부르는 쪽이 음높이를 옮겨 부른다. 작곡 실력을 보여 주는 형식이라 음악원 졸업 작품에 자주 들어갔다. (다른 데서는) 정신의학에서 '둔주(fugue)'는 자기가 누구인지 잊고 집을 떠나 떠도는 상태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