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udio Monteverdi
가사를 화성의 주인으로 세워, 노래가 사람의 말처럼 탄식하고 분노하게 만든 작곡가.
한눈에 보기 🔭💭
일부 지명 좌표 출처(가공): GeoNames (CC BY 4.0) · Pleiades (CC BY 3.0)
곁의 사람들 ⏳🌊
- 스승마르칸토니오 인제녜리
크레모나 대성당 악장으로, 소년 몬테베르디에게 엄격한 대위법을 가르쳤다.
- 후원빈첸초 1세 곤차가
만토바 공작으로 '오르페오'를 낳은 궁정을 꾸렸지만, 급여는 늘 늦었다.
- 가족클라우디아 카타네오
궁정 가수였던 아내로, 두 아들을 남기고 1607년에 세상을 떠났다.
- 경쟁조반니 마리아 아르투시
그의 불협화음을 공개 비판해 '제2작법' 선언을 이끌어 낸 이론가다.
- 우정알레산드로 스트리조
'오르페오'의 대본가로, 베네치아 시절까지 속내를 털어놓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 제자프란체스코 카발리
소년 시절 산마르코 성가대에서 그의 지도를 받았고, 뒤에 베네치아 오페라를 이끌었다.
I. 크레모나의 소년 · 1567–1590 (0–23세)
(출생) 1567년 5월, 밀라노 공국(오늘날 이탈리아) 크레모나에서 태어났다. 5월 15일에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 발다사레 몬테베르디는 이발사 겸 외과의였다. 당시 이발사는 머리를 깎는 일 말고도 피를 뽑고 상처를 돌보는 일을 했고, 발다사레는 훗날 정식 의사 자격까지 얻었다. 크레모나는 스페인이 다스리던 밀라노 공국의 도시였고, 바이올린 제작 가문 아마티의 공방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어머니) 어머니 마달레나 치냐니는 그가 아홉 살 무렵인 1576년께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곧 재혼했으나 둘째 아내도 1584년에 죽어 세 번째 결혼을 했다. 형제로는 누이 마리아 도미틸라와 여섯 살 아래 동생 줄리오 체사레가 있었다. 줄리오 체사레도 음악가가 되었고, 훗날 형을 변호하는 글을 쓰게 된다. 이른 상실과 잦은 집안의 변화가 소년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는 기록에 없다. (스승) 음악은 크레모나 대성당의 악장 마르칸토니오 인제녜리에게 배웠다. 인제녜리는 여러 성부를 규칙에 맞게 엮는 엄격한 대위법을 가르친 성실한 장인이었다. 몬테베르디는 1582년, 열다섯 살에 첫 악보집 '거룩한 작은 노래들'을 냈다. 표지에는 스스로를 '인제녜리의 제자'라고 적었다. 이어 영적 마드리갈집(1583)과 칸초네타집(1584)을 펴냈다. (야심) 1587년에 마드리갈 제1권, 1590년에 제2권을 냈다. 제2권은 밀라노 원로원 의장에게 헌정했는데, 지방 도시의 젊은 음악가가 더 큰 무대에 이름을 알리려는 시도였다. 타소의 시에 곡을 붙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크레모나에는 그가 오를 자리가 없었다. 그는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II. 곤차가 궁정의 악사 · 1590–1606 (23–39세)
(만토바) 1590년 무렵 만토바의 빈첸초 1세 곤차가 공작 궁정에 비올라 연주자로 들어갔다. 사치스럽고 예술을 사랑한 공작의 궁정에는 화가 루벤스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드나들었다. 악장은 플랑드르 출신의 자케스 데 베르트였다. 몬테베르디는 그에게서 시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음악으로 극화하는 법을 익혔고, 1592년의 마드리갈 제3권에 그 영향이 짙게 남았다. (종군) 1595년에는 공작을 따라 오스만 제국과 싸우는 헝가리 원정에 나섰고, 1599년에는 플랑드르 여행에 동행했다. 1596년 베르트가 죽었을 때 악장 자리는 선배 베네데토 팔라비치노에게 돌아갔다. 몬테베르디가 악장이 된 것은 팔라비치노가 죽은 1601년이었다. (결혼) 1599년 5월, 궁정 악사 자코모 카타네오의 딸이자 가수인 클라우디아와 결혼했다. 1601년 맏아들 프란체스코가, 1603년 딸 레오니다가 태어났으나 레오니다는 어려서 죽었다. 1604년에는 둘째 아들 마시밀리아노가 태어났다. 클라우디아는 궁정에서 노래하며 남편의 음악을 가장 가까이에서 불렀다. (논쟁) 1600년 볼로냐의 수도사이자 이론가 조반니 마리아 아르투시가 책을 내어, 아직 출판되지도 않은 그의 마드리갈을 공격했다. '잔인한 아마릴리' 같은 곡에서 준비 없이 터지는 불협화음이 규칙을 어긴다는 것이었다. 몬테베르디는 1605년 마드리갈 제5권 서문에서 옛 규칙과 다른 '제2작법'이 있다고 짧게 답했다. 1607년에는 동생 줄리오 체사레가 형을 대신해 “말이 화성의 주인이어야 하며 그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풀어 썼다. 제5권 끝의 여섯 곡에는 통주저음이 반드시 붙어 있다. 마드리갈이 독창과 반주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었다.
아르투시가 규칙 위반의 본보기로 지목한 곡이다. 제2작법 논쟁이 바로 이 몇 마디에서 시작됐다.
- 첫 단어 'Cruda'(잔인한)를 다섯 성부가 한 덩어리로 내뱉는 도입은 마치 원망하는 한마디 말처럼 들린다.
- 'ahi lasso'(아, 슬프다) 근처에서 맨 위 소프라노가 아래 성부와 부딪치는 음(불협화음)을 미리 준비하지 않고 곧장 내는 대목이 아르투시가 문제 삼은 곳이다. 위 성부만 따라가며 들어 보면 부딪침이 잘 들린다.
- 가사는 과리니의 희곡 '충실한 목자'에서 왔다. 사랑을 거절당한 목동의 쓰라림이 화음의 거친 결로 옮겨졌다.
- 다섯 사람이 반주 없이 부르는 연주와 류트나 하프시코드가 저음을 받쳐 주는 연주(통주저음)를 비교해 보면 음색의 차이가 크다.
III. 오르페오와 두 죽음 · 1607–1612 (40–45세)
(오르페오) 1607년 2월 24일, 만토바 궁정의 학술 모임에서 '오르페오'가 초연됐다. 대본은 궁정 관리 알레산드로 스트리조가 썼다. 앞서 피렌체의 페리 등이 모노디(독창 선율에 간단한 반주를 붙인 노래)로 그리스 비극을 되살리려 한 시도가 있었다. 몬테베르디는 여기서 더 나아가 장면마다 악기를 지정하고, 노래와 합창과 춤곡을 엮어 극 전체를 음악으로 끌고 갔다. 같은 신화는 한 세기 반 뒤 글루크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1762)에서 오페라 개혁의 출발점이 된다. (상실) 그해 9월 10일 아내 클라우디아가 크레모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여섯 살과 세 살 난 두 아들과 함께 남겨졌다. 궁정은 곧 그를 불러들여, 이듬해 공작 아들의 결혼식에 올릴 오페라 '아리아나'를 맡겼다. 주역으로 정해진 열여덟 살 가수 카테리나 마르티넬리는 그의 집에서 지내며 배우던 제자였는데, 1608년 3월 천연두로 죽었다. 대역이 부른 '아리아나의 탄식'은 객석을 울렸다고 전한다. 1610년에는 마르티넬리를 애도하는 6성 마드리갈 '연인의 무덤에 바치는 눈물'을 썼다. (피로) 과로로 앓아누운 아들을 위해 아버지 발다사레는 공작 부인에게 아들을 궁정에서 놓아 달라는 청원을 냈다. 몬테베르디도 1608년 12월 궁정 관리에게 편지를 보내, 밀린 급여와 무리한 일정에 대한 울분을 쏟아냈다. 공작은 연금을 약속했지만, 그 지급 문제는 이후 수십 년 동안 그를 애태웠다. (해고) 1610년 그는 '성모 마리아의 저녁기도'를 교황 바오로 5세에게 헌정했다. 직접 로마로 가서 새 자리와 아들의 신학교 자리를 구했으나 얻지 못했다. 1612년 빈첸초 공작이 죽었고, 뒤를 이은 아들 프란체스코는 그해 7월 그를 해고했다. 그는 20년 넘게 섬긴 궁정을 떠나 크레모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다.
궁정 축제를 위해 쓴 이 작품은 노래와 악기로 한 편의 비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간 첫 걸작이 되었다. 초연 몇 달 뒤 작곡가 자신이 아내를 잃었다.
- 막이 오르기 전 금관이 같은 화음을 세 번 울리는 토카타(악기로 화려하게 울리는 짧은 개막 음악)는 곤차가 가문의 의전 팡파르로 여겨진다. 이 음악은 3년 뒤 '저녁기도'의 첫 곡에도 다시 쓰였다.
- 2막에서 목동들이 즐겁게 노래하던 중 전령이 '아, 쓰라린 일이여'라며 들어서는 순간 화음의 색이 갑자기 어두워진다. 에우리디케의 죽음을 알리는 극의 전환점이다.
- 오르페오의 '너는 죽었구나'(Tu se' morta)는 반주가 거의 없이 말하듯 노래하는 모노디다. 말의 억양을 따라 오르내리는 선율에 귀를 기울여 보라.
- 3막 '강력한 정령이여'(Possente spirto)에서 오르페오는 저승 뱃사공을 설득한다. 악보에는 담백한 선율과 화려하게 꾸민 선율 두 가지가 함께 인쇄되어 있다. 바이올린, 코르네토(나무로 만든 옛 금관악기), 하프가 차례로 대답하는 부분이 연주자 비교의 핵심이다.
- 지옥 장면에서는 악보 지시대로 트롬본과 리갈(갈대 떨림판을 쓴 작은 오르간)의 거친 소리가 나온다. 지상 장면의 현악·리코더와 색이 확연히 다르다.
아내와 제자를 잇달아 잃은 해에 쓴 오페라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장면이다. 당시 기록은 이 대목에서 울지 않은 부인이 없었다고 전한다.
- 첫 구절 'Lasciatemi morire'(날 죽게 내버려 두오)는 노래 전체에서 후렴처럼 돌아온다. 돌아올 때마다 앞뒤 맥락이 달라 같은 말이 다르게 들린다.
- 떠나 버린 테세우스를 부르다가 원망하고, 다시 원망한 것을 후회하는 감정의 급변이 선율과 템포의 변화로 그대로 드러난다.
- 몬테베르디는 이 곡을 5성 마드리갈로도 고쳐 썼다. 1640년에는 라틴어 가사를 붙여 성모의 탄식('성모의 눈물')으로 바꾸기도 했다. 세 판본을 나란히 들어 보면 같은 선율이 얼마나 다른 옷을 입는지 알 수 있다.
궁정에 지쳐 새 자리를 찾던 그가 교황에게 헌정한 악보집이다. 옛 교회 양식과 새 극적 양식을 한 권에 모두 보여 주려는 일종의 이력서이기도 했다.
- 첫 곡 '하느님, 저를 도우소서'는 '오르페오'의 개막 토카타를 그대로 가져와 그 위에 합창이 한 화음으로 기도문을 낭송한다. 궁정 오페라와 교회음악이 한 뿌리임을 들을 수 있다.
- '하늘이여 들으소서'(Audi coelum)에서는 테너가 부른 말의 끝 음절을 다른 테너가 멀리서 메아리처럼 받는다. 받는 쪽은 뜻이 다른 단어가 되도록 짜여 있다.
- '거룩한 마리아에 의한 소나타'에서는 악기들이 활발하게 주고받는 동안 소프라노가 '거룩한 마리아여, 우리를 위해 기도하소서'라는 짧은 성가 가락을 열한 번 되풀이한다.
- 마지막 두 곡을 악보보다 낮게 옮겨 불러야 하는지, 전곡을 한 번의 예배로 연주했는지를 두고 학자와 연주자의 해석이 갈린다. 음반마다 음높이와 편성이 다른 이유다.
IV. 산마르코의 악장 · 1613–1629 (46–62세)
(베네치아) 1613년 8월, 베네치아 공화국 산마르코 대성당의 악장으로 뽑혔다. 연봉 300두카트에 관사가 딸렸고, 1616년에는 400두카트로 올랐다. 늘 늦게 나오던 만토바의 급여와 달리 공화국은 제때 돈을 주었다. 부임 길에는 산귀네토 근처에서 노상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는 성가대를 재정비하고 새 가수를 뽑고 악보를 새로 사들였다. 1616년에는 소년 프란체스코 카발리가 성가대에 들어왔다. (자존) 만토바는 그 뒤로도 그에게 일을 맡기려 했다. 1616년 바다의 신과 바람들이 노래하는 극을 의뢰받자, 그는 스트리조에게 이렇게 썼다. 아리아나가 사람을 움직인 것은 여인이었기 때문이고 오르페오는 사람이었기 때문인데, 바람이 어떻게 노래하며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음악은 사람의 감정을 그려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이 편지에 그대로 드러난다. (아들들) 맏아들 프란체스코는 볼로냐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수도사가 되겠다고 해 아버지를 걱정시켰고, 결국 산마르코의 가수가 되었다. 둘째 마시밀리아노는 의학을 공부해 의사가 되었다. 그런데 1627년 금서를 읽었다는 혐의로 만토바 종교재판소에 갇혔다. 몬테베르디는 만토바의 인맥에 편지를 보내고 보증금을 마련하며 몇 달을 매달렸고, 아들은 이듬해 무죄로 풀려났다. (격앙) 1624년 사육제 기간, 귀족 지롤라모 모체니고의 저택에서 '탕크레디와 클로린다의 싸움'이 공연됐다. 타소의 서사시를 해설자가 노래하고 두 기사가 몸짓으로 연기하는 작품이다. 그는 여기서 같은 음을 빠르게 두드려 분노와 전투를 그리는 격앙 양식(스틸레 콘치타토)을 시험했다. 훗날 그는 이 공연을 본 귀족들이 연민에 사로잡혀 거의 눈물을 쏟을 뻔했다고 적었다.
베네치아 귀족의 저택에서 초연된 작품으로, 분노와 전투를 소리로 그리려던 실험이 담겼다. 적이 연인이었음을 너무 늦게 깨닫는 기사의 이야기다.
- 해설자 역의 테키스토(Testo, 이야기꾼)가 대부분을 노래한다. 두 기사는 몇 마디만 부른다. 이야기꾼의 목소리가 얼마나 연기하듯 바뀌는지가 연주의 관건이다.
- 말이 달리는 대목에서는 현악기가 길고 짧은 리듬을 되풀이해 말발굽 소리를 흉내 낸다.
- 싸움이 격해지면 현악기가 한 음을 빠르게 연타한다. 이것이 몬테베르디가 말한 격앙 양식이다. 칼끝이 부딪치는 긴장처럼 들린다.
- 악보에는 활을 내려놓고 두 손가락으로 줄을 뜯으라는 지시가 있다. 현을 손가락으로 뜯는 주법(피치카토)을 악보에 명시한 이른 사례로 꼽힌다.
- 끝에서 죽어 가는 클로린다가 '하늘이 열리네, 나는 평화 속에 가노라'라고 노래한다. 높고 잔잔한 이 선율이 앞의 소란과 대조된다.
V. 역병과 서원 · 1630–1638 (63–71세)
(역병) 1630년 여름부터 이듬해까지 베네치아에 페스트가 돌아 4만 명이 넘는 시민이 죽었다. 공화국은 역병이 끝나면 성모께 성당을 지어 바치겠다고 서원했다. 그 성당이 오늘날의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다. 1631년 11월 산마르코에서 역병이 끝난 것을 감사하는 미사가 열렸고, 몬테베르디가 그 음악을 맡았다. 훗날 '도덕적이고 영적인 숲'에 실린 7성부 글로리아가 그때의 곡이라는 견해가 있다. (사제) 1632년 무렵 그는 사제 서품을 받았다. 아내를 잃은 지 25년, 예순을 넘긴 나이였다. 역병을 지나온 경험이 결심에 작용했으리라는 추측이 있지만, 그는 이유를 남기지 않았다. 같은 해 가벼운 노래 모음 '음악의 스케르초'를 내며 세속 음악도 놓지 않았다. (정리) 1638년 그는 수십 년 동안 쓴 작품을 모아 마드리갈 제8권 '전쟁과 사랑의 마드리갈'을 펴내고 황제 페르디난트 3세에게 헌정했다. 서문에서 그는 사람의 감정을 분노, 절제, 겸손의 셋으로 나누었다. 그때까지의 음악에는 분노를 그리는 방식이 없었기에 자신이 격앙 양식을 찾아냈다고 썼다. '탕크레디와 클로린다의 싸움'도 이 책에 실렸다. (님프) 같은 책에 실린 '님프의 탄식'은 네 음이 계단처럼 내려가는 저음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오스티나토 위에서 펼쳐진다. 버림받은 여인이 노래하고, 세 남자가 곁에서 그녀를 안타까워한다. 그는 악보에 이 여인의 노래를 손이 젓는 박자가 아니라 마음의 감정이 정하는 박자로 부르라고 적었다. 노년의 정리 작업 속에서도 그의 관심은 상처 입은 사람의 목소리에 있었다.
노년에 지난 작품을 정리하며 펴낸 제8권에 실린 곡이다. 버림받은 여인의 슬픔을 한 줄기 저음 위에 쌓아 올렸다.
- 저음이 '라-솔-파-미' 네 음으로 계단처럼 내려가는(하행) 같은 무늬를 처음부터 끝까지 되풀이한다(오스티나토). 이 하행 4음은 바로크 시대에 '탄식'을 상징하는 저음 무늬로 자리 잡았다.
- 님프는 고정된 저음과 일부러 어긋나게, 감정에 따라 박자를 늘이고 당기며 노래한다. 작곡가가 서문에 적은 '마음의 박자'가 바로 이것이다.
- 곁의 세 남자가 'Miserella'(가엾어라)라고 끼어드는 짧은 대목은 무대 밖에서 지켜보는 관객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VI. 마지막 무대 · 1639–1643 (72–76세)
(극장) 1637년 베네치아에 세계 최초의 공공 오페라 극장인 산 카시아노 극장이 문을 열었다. 표를 사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었다. 궁정의 잔치였던 오페라가 시민의 오락이 된 것이다. 1640년에는 '아리아나'가 산 모이세 극장에서 다시 공연됐다. 일흔을 넘긴 몬테베르디는 '율리시스의 귀환'(1640)과 지금은 전하지 않는 '에네아의 결혼'(1641)을 잇달아 썼다. (포페아) 1642년에서 1643년으로 넘어가는 사육제 시즌, 산티 조반니 에 파올로 극장에서 '포페아의 대관'이 올랐다. 부세넬로가 쓴 대본은 네로 황제와 정부 포페아가 왕비 오타비아와 스승 세네카를 밀어내고 권좌에 오르는 이야기다. 신과 영웅 대신 욕망과 야심을 지닌 인간이 무대의 중심에 섰다. 악행이 벌을 받지 않고 사랑이 승리하는 결말을 두고 지금도 해석이 갈린다. 남은 악보에는 제자 카발리 등 다른 손이 섞였다고 보는 학자가 많다. (귀향) 1643년 그는 오래 미뤄 둔 휴가를 얻어 고향 크레모나와 만토바를 찾았다. 밀린 만토바 연금을 해결하려는 뜻도 있었던 것으로 본다. 베네치아로 돌아온 뒤 열병을 앓다가 11월 29일 일흔여섯 살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졌고, 그는 프라리 성당 안 롬바르디아 사람들의 예배당에 묻혔다. (망각) 그가 쓴 무대 작품은 대부분 사라졌다. 남은 음악도 곧 유행에서 밀려나 오랫동안 연주되지 않았다. '오르페오'가 다시 청중 앞에 선 것은 20세기 초의 일이다. 그 뒤 그는 오페라라는 장르의 첫 걸작을 쓴 사람으로 자리를 되찾았다.
공공 극장 시대에 일흔다섯의 작곡가가 내놓은 마지막 오페라다. 신화 대신 권력과 욕망을 지닌 인간을 무대에 세웠다.
- 프롤로그에서 운명, 미덕, 사랑의 여신이 서로 자기가 더 세다고 다툰다. 극 전체가 '사랑이 이긴다'는 결말을 미리 알리는 셈이다.
- 2막에서 세네카가 자결을 명받자 제자들이 '죽지 마오, 세네카'를 부른다. 반음씩 기어오르는(반음계 상행) 선율이 절박하게 들린다.
- 폐위된 왕비 오타비아가 부르는 '안녕, 로마여'는 말이 자꾸 끊기며 더듬는다. 오페라에서 가장 처연한 독백으로 꼽힌다.
- 네로 역은 원래 소년 시절 거세한 남성 가수(카스트라토)를 위해 높은 음역으로 쓰였다. 오늘날에는 메조소프라노나 카운터테너가 부르니, 누가 부르느냐에 따라 네로의 인상이 크게 달라진다.
- 마지막 이중창 '그대를 바라보네'(Pur ti miro)는 가장 사랑받는 대목이다. 하지만 몬테베르디가 아닌 다른 작곡가의 음악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덜 알려진 이야기
1613년 베네치아로 부임하던 길에 그는 산귀네토 근처에서 무장한 강도들을 만나 돈과 짐을 빼앗겼다. 이 일은 그가 만토바의 관리에게 보낸 긴 편지에 자세히 남아 있다. 작곡가의 편지라고 하면 음악 이야기를 기대하기 쉽지만, 남아 있는 120여 통의 대부분은 급여와 연금, 여행, 가족 걱정 같은 생활의 기록이다. 이 편지들이 정리되어 널리 읽힌 것은 20세기 들어서였다. 1625년과 1626년 만토바의 지인 에르콜레 마리얄리에게 보낸 편지에는 연금술 실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수은을 다루는 방법과 불의 세기를 두고 의견을 주고받았다. 당시 연금술은 화학과 의학에 가까운 학문으로 여겨졌고, 아버지가 의사였던 그에게 낯선 세계가 아니었다. 음악사 서술에서는 곁가지로 여겨져 잘 다뤄지지 않는다. '포페아의 대관'의 마지막 이중창 '그대를 바라보네'는 이 오페라의 상징처럼 불리지만, 그 가사는 베네데토 페라리의 다른 대본(1641)에도 나온다. 이 오페라의 악보는 작곡가가 죽은 뒤 베네치아와 나폴리에서 만들어진 필사본 두 개로만 전한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이중창을 포함한 일부 대목을 다른 작곡가의 손으로 본다. 가장 유명한 장면이 그의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은 공연 프로그램에 잘 적히지 않는다. 그가 쓴 무대 작품은 기록상 열 편이 훌쩍 넘지만 악보가 전하는 오페라는 세 편뿐이다. '아리아나'도 탄식 장면 하나만 남았다. 그의 명성은 남은 것만으로 쌓였고, 사라진 것의 크기는 짐작할 수밖에 없다.
용어 노트 📚🔎
마드리갈
(음악에서) 16~17세기 이탈리아에서 꽃핀 세속 성악곡으로, 보통 네다섯 명이 각자 다른 가락을 동시에 부른다. 사랑이나 슬픔을 노래한 시의 단어 하나하나를 음으로 그려 내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한숨'이라는 말에서는 잠깐 쉬고, '하늘'에서는 높이 올라간다. 친구 몇 명이 노래방이 아니라 둘러앉아 각자 다른 파트를 맡아 화음을 맞추는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 몬테베르디는 평생 아홉 권의 마드리갈집을 냈고, 그 안에서 르네상스 음악이 바로크 음악으로 바뀌어 갔다.
모노디
(말뜻) 그리스어 monos(혼자)와 ode(노래)가 합쳐진 말로, '혼자 부르는 노래'라는 뜻이다. (음악에서) 1600년 무렵 피렌체 사람들이 고대 그리스 비극처럼 말을 또렷이 들리게 하려고 만든 노래 방식이다. 한 사람이 말의 억양을 따라 노래하고, 악기는 화음만 간단히 받쳐 준다. 여러 명이 겹쳐 부르면 가사가 잘 안 들리던 문제를 풀려는 시도였다. 교실에서 한 친구가 시를 낭송하고 뒤에서 누가 기타로 화음만 살살 짚어 주는 것과 비슷하다. 오페라의 대사 부분이 여기서 나왔다.
통주저음
(말뜻) 통주저음(通奏低音)은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어(通) 연주하는(奏) 낮은 음(低音)이라는 뜻이다. 이탈리아어 바소 콘티누오(basso continuo)도 '계속되는 저음'이라는 뜻이다. (음악에서) 바로크 음악에서 낮은 음 악기(첼로, 바순 등)가 저음 선율을 계속 연주하고, 하프시코드나 류트 같은 화음 악기가 그 위에 화음을 즉석에서 채워 넣는 반주 방식이다. 악보에는 저음과 몇 개의 숫자만 적혀 있고, 연주자가 그것을 보고 화음을 만든다. 밴드에서 베이스와 키보드가 노래 밑을 계속 받쳐 주고 키보드는 코드표만 보고 반주를 지어내는 것과 거의 같다.
불협화음
(말뜻) 불협화음(不協和音)은 서로 잘 어울리지(協和) 않는(不) 소리라는 뜻이다. (음악에서) 함께 울릴 때 거칠고 긴장감 있게 들리는 음의 조합이다. 옛 규칙에서는 불협화음을 쓰려면 앞에서 미리 그 음을 준비하고, 뒤에서 어울리는 음으로 풀어 주어야 했다. 몬테베르디는 슬픔이나 고통을 표현하려고 이 준비 없이 불협화음을 터뜨렸다가 비판을 받았다. 공포 영화에서 갑자기 '쾅' 하고 거슬리는 소리가 나서 깜짝 놀라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놀라게 하려면 예고 없이 와야 효과가 크다. (다른 데서는) 일상에서는 '팀 안에 불협화음이 생겼다'처럼 사람들 사이의 다툼이나 엇박자를 가리킬 때 쓴다.
제2작법
(말뜻) 이탈리아어 세콘다 프라티카(seconda pratica)를 옮긴 말이다. 프라티카는 '실제로 해 나가는 방식'이라는 뜻이니, '두 번째 작곡 방식'이라는 말이다. (음악에서) 몬테베르디가 옛 대위법 규칙(제1작법)과 구별해 내세운 생각이다. 핵심은 '말이 음악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가사의 감정을 살리는 데 필요하면 화음 규칙을 어겨도 된다고 보았다. 학교 글짓기에서 맞춤법과 문법을 지키는 게 기본이지만, 시를 쓸 때는 일부러 문장을 끊거나 뒤집어 감정을 살리는 것과 비슷하다. 이 생각이 오페라와 바로크 음악으로 이어졌다.
격앙 양식
(말뜻) 이탈리아어 스틸레 콘치타토(stile concitato)를 옮긴 말이다. 콘치타토는 '흥분한, 몰아붙여진'이라는 뜻이다. (음악에서) 몬테베르디가 분노와 전투를 표현하려고 만든 방식이다. 한 음을 아주 짧은 음표로 빠르게 반복해 연주한다. 그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글에서 힌트를 얻었고, 그때까지의 음악에는 분노를 그리는 방법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운동회에서 응원단이 북을 '두두두두' 빠르게 두드리면 가만히 있어도 심장이 뛰는 것과 같은 원리다.
오스티나토
(말뜻) 이탈리아어로 '고집 센'이라는 뜻이다. 같은 무늬를 고집스럽게 되풀이한다는 데서 붙은 이름이다. (음악에서) 짧은 가락이나 리듬을 곡 내내 계속 반복하고, 그 위에서 다른 선율이 자유롭게 변해 가는 방식이다. 몬테베르디의 '님프의 탄식'에서는 네 음이 내려가는 저음이 끝없이 반복된다. 줄넘기에서 두 사람이 똑같은 박자로 줄을 계속 돌리고, 가운데 들어간 사람이 그 위에서 갖가지 동작을 하는 모습과 닮았다.